[연속기고] 원칙도 기준도 없는 의료비가 횡행 제갈현숙 (노동권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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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직업환경의학센터가 주관하는 미등록이주민 의료비 지원사업 ‘하모니 치유열매’ 현장
한 여성이 아이를 출산했다. 자연분만으로 나흘 입원한 이 여성에게 병원은 1,400만 원의 의료비를 청구했다. 만약 건강보험이 적용됐다면 본인이 부담할 의료비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또 다른 한 남성은 급성 심근경색으로 119에 실려 응급실에 도착했는데 400만 원 선납을 요구받았다. 선납 후 치료가 시작됐고 치료비가 3,000만 원을 넘자 병원은 이 환자의 휴대전화를 가져가 지인과의 연락마저 차단했다.
이 여성과 남성은 이른바 ‘불법체류자’로 불리는 미등록 이주민이었다. 이처럼 미등록 이주민들은 아이를 낳거나 아플 때 건강보험을 적용받지 못한 채 병원이 요구하는 대로 의료비를 떠안고 불합리한 대우까지 감수해야 한다.
건강보험 가입자에게는 매우 낯선 ‘국제수가’라는 것이 미등록 이주민들에게 적용되면서 원칙도 기준도 없는 의료비가 횡행하고 있다.
지난 2016년 시행된 「의료해외진출법」은 의료관광을 목적으로 입국한 외국인 환자에게 병원이 자율적으로 진료비를 책정할 수 있도록 했다. 문제는 시행규칙이 적용제외 대상을 ‘등록 이주민’으로만 한정한 탓에 의료관광 입국자에게나 적용될 비싼 수가가 한국에서 일하고 살아가는 미등록 이주민들에게도 적용된다는 점이다.
국제수가는 건강보험 수가의 평균 3~5배인데 병원에 따라 10배를 넘기도 하며 상한 기준이나 규제도 없이 작동하고 있다. 심장이식에 5억 원 이상이 청구된 사례가 있을 뿐만 아니라 공공성의 보루여야 할 국립대학교병원조차도 국제수가를 무차별적으로 적용하고 있다.
한국은 지난 1990년 UN 사회권규약(ICESCR)을 비준했다. 이에 따라 한국은 이주민들의 건강권을 법적 구속력이 있는 권리로 보장할 의무가 있으며 ICESCR은 체류자격에 따른 차별을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 건강권을 가로막는 장벽은 미등록 이주민뿐만 아니라 등록 이주민들에게도 만연해 있다.
한국 사회에서 가장 보편적인 건강보장 제도인 건강보험은 다양한 측면에서 이주민을 다르게 대우하고 있다. 첫째, 가입 문턱이 지나치게 높아 사각지대에 놓인 이주민들이 상당하다.
지난 2023년 기준 체류이주민 250만여 명 가운데 105만여 명, 무려 42%가 건강보험 밖에 있다. 대표적으로 미등록 이주민들이 있고 그 외에도 단기체류자, 입국 후 6개월의 체류요건을 채워야만 가입자격이 주어지는 탓에 공백기에 놓인 이주민, 난민신청자 등이 있다.
또한 한국국적의 신생아는 출생시점부터 자동으로 부모의 건강보험이 적용되는 반면 한국에서 태어난 이주배경 신생아는 출생순간 아무 자격이 없고 출생일로부터 90일 안에 외국인 등록과 건강보험 가입절차를 따로 밟아야만 보험자격이 출생일로 소급·적용된다.
이 기한을 하루라도 넘기면 소급이 되지 않아 출생 후 가입 전까지의 기간은 무보험 상태로 확정되고 만다. 그런데 이러한 외국인 등록에는 아이의 여권이 필요하고 본국 대사관의 사정에 따라 발급에 수개월이 걸리는 경우도 허다하다.
둘째, 세상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차별적 보험료 부과방식이다. 내국인 지역가입자는 소득과 재산에 비례해 보험료를 내지만 이주민들에게는 자신의 소득과 무관하게 지역가입자 전체의 평균보험료(2026년 월 158,630원)가 일괄 부과된다.
이 보험료에는 건강보험료와 장기요양보험료가 모두 합산돼 있지만 장기요양보험 급여를 받을 권리는 사실상 보장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일괄적인 보험료 부과는 사회보험의 원칙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최저임금 수준이거나 그에도 못 미치는 소득의 이주노동자들에게는 매우 역진적이다.
셋째, 피부양자와 세대원 인정 범위에서 커다란 차이가 있다. 직장가입자 이주민의 피부양자는 국내 체류와 유효한 체류자격이 전제돼야 하고 배우자와 미성년 자녀를 제외한 부모 등은 입국 후 6개월 체류요건까지 채워야 한다.
그동안 건강보험 공백이 발생한다. 지역가입자 이주민의 세대원은 배우자와 미성년 자녀로만 제한된다. 그 외 가족은 모두 인정되지 않아 함께 거주하더라도 각자 별도의 지역가입자로 등록해 보험료를 따로 내야 한다.
넷째, 체납제재는 더욱 노골적이다. 내국인은 6번 체납해도 급여가 유지되지만 이주민은 단 한 번만 체납해도 즉시 급여가 끊기고 비자연장까지 제한된다.
헌법재판소는 지난 2023년 9월 이 조항에 대해 재판관 전원일치로 헌법불합치를 결정했고 이에 따라 2025년 4월부터는 급여제한 기준이 1회 체납에서 3회 이상 체납으로 완화됐지만 여전히 차별 자체는 유지되고 있다.
‘외국인 건보 퍼주기’라는 일부 언론의 호들갑은 사실과 정반대다. 이주민 가입자의 건강보험 재정수지는 줄곧 흑자였고 지난 2024년에는 9,439억 원으로 역대 최대였다.
전체 재정이 수조 원대 적자인 동안 더 많은 보험료를 내고 더 적은 급여를 받는 이주민들이 오히려 재정을 떠받쳐 왔지만 이들은 홀대를받으면서 건강권에서 차별당해왔다. 그 결과 이주민의 미충족 의료율은 28.2%로 내국인(11.5%)의 두 배가 넘는다.
건강권은 온정의 문제가 아니라 초저출생·초고령 사회를 무사히 건너가기 위해 우리 사회가 함께 보장해야 할 동등한 권리로 자리잡아야 한다.
먼저 취할 수 있는 조치는 복잡하지 않다. 시행규칙 한 조항만 고쳐 국제수가를 본래의 취지대로 의료관광 입국자에게만 적용하면 미등록 이주민들에게 수배의 진료비를 물리는 일부터 막을 수 있다.
여기에 이주민에 대한 6개월 체류요건 폐지, 내국인과 동일한 보험료 부과 및 체납 제재기준 적용으로 전환하면 된다.
차별을 형평성으로 둔갑시키면 안 된다. 건강권은 국적 이전에 생명권이자 모든 인간의 기본권이다.
우리 사회의 가장 힘든 자리에서 낮은 소득 탓에 모두가 꺼리는 일을 해주는 우리의 이웃들이 아플 때 돈 때문에 치료를 미루거나 포기하지 않도록, 높은 진입장벽에 막혀 건강권을 잃지 않도록 제대로 살펴봐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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