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권에 관한 서울시민회의가 우리 사회에 던지는 함의."
: [건강권에 관한 서울 시민회의 후기]
손정인 (건강권 서울시민회의 기획단)
건강권 개념은 한국 사회의 건강과 보건의료 문제 해결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에 대한 논의는 미미하고, 논의가 있더라도 추상적 수준이거나 전문가의 영역에 머물러 있다. 보다 나은 실천을 위해 건강권 개념을 일상과 현장의 언어로 번역하고 구체화하는 ‘귀납적 방식’이 필요한 때다.
작년 말 자그마한 실천 활동으로 ‘건강권에 관한 서울시민회의 – 서울시민, 건강권을 선언하다! 쪽방 주민의 삶을 중심으로(이하, 건강권 서울시민회의)’를 진행하였다. 서울연구원의 연구비 지원을 받아 어렵사리 시작하게 되었다. 2012년 ‘서울시 동자동 쪽방 주민 건강권 실태조사’에 참여한 활동가와 연구자 4인이 만든 ‘건강권 서울시민회의 기획단(이하 실무진)’이 기획과 실무를 맡았다.
건강권 서울시민회의의 목적은 비전문가인 일반 시민의 건강권 개념 논의와 쪽방 주민의 사례 평가 및 권고안 도출이었다. 2013년 11월 관심 있는 일반 시민(이하, 시민패널) 총 13인을 모집하였다. 시민패널에게 주어진 과제는 “건강권의 내용과 수준에 대한 논의를 통해 서울시 쪽방 주민의 건강권 현황을 평가하고 권고안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2013년 11월 30일 ~ 12월 14일 사이 2차례의 예비모임과 이틀간의 본회의가 진행되었다. 12월 14일 최종 선언문이 완성되었다.(참고로 건강권 서울시민회의 동영상이 유투브에 올려져있다.)
건강권 서울시민회의의 과정과 내용, 그리고 이에 대한 평가는 이전 기고문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럼에도 건강권 서울시민회의의 기획과 실무를 담당한 일원으로 보태고 싶고 또 보태야 하는 것이 있다. 시작과 종료조차 ‘불확실’했던 이번 기획이 어떻게 최종 선언문이 도출되는 ‘확실’한 사례로 마칠 수 있었는지에 대한 검토이다.
건강권 서울시민회의의 기획에는 3가지 ‘불확실’한 측면이 있었다. 주체, 내용, 효과였다.
먼저 주체란 건강권 서울시민회의에 참여하는 사람이다. 건강권과 빈곤은 사회적 관심이 미미한 데다, 예산의 한계로 참여자 사례비가 적거나 아예 책정하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뭘 논의하는지 논의 주제는 추상적이고, 더군다나 4차례나 모여야 했다. 과연 실무진을 빼면 일반 시민과 여타 참여자들이 선뜻 함께하려 할까? 그야말로 자신이 없었다. 더군다나 일정 가운데 금요일도 끼여 있어 어려운 상황이었다.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사람들은 참여했다. 참여한 분들은 관심과 열의가 높은 분들이었다. 비전문가 일반인인 시민패널, 외부 전문가로 구성된 의사결정과 자문 역할의 조정위원들, 행사 진행 사회와 토론 촉진을 맡은 퍼실리테이터들, 강의를 맡아준 전문가 패널, 토론과 질의응답을 기록했던 서기들. 적극적으로 자신의 역할에 임했고 자극과 격려, 때로 일손까지 보태었다.
가장 어려운 부분은 시민패널 모집이었다. 거의 4주 동안 온·오프라인으로 가용한 모든 자원을 동원했지만 연령과 직업 구성이 우려가 되었다. 연령의 경우 ‘50대 이상의 일반 시민’에게 다가가기가 너무 어려웠다. 다행히 서울시의 온라인 뉴스 공간을 활용하여 50대 후반과 60대의 일반 시민 5분을 모집할 수 있었다. 직업의 경우 금요일 때문에 30대, 40대, 50대의 직장인, 특히 남성 직장인 모집이 어려웠다. 이는 한계로 남았다.
둘째, ‘불확실’한 내용이란 시민패널의 과제였다. 과제는 앞서 서술한 한 문장이 전부였다. 대부분 추상적이고 어려워서 논의에 적합하지 않다고 하였다. ‘전력정책 미래에 대한 시민합의회의’ 실무자였던 김병수 시민과학센터 부소장도 주제 설정이 매우 중요하다고 하였다. 그럼에도 의사결정기구인 조정위원회에서는 최대한 다양한 논의의 장이 되도록 더 이상 내용을 구조화하지 않도록 결정하였다. 단, 논의의 효율성을 위해 논의 과정의 구조화만 허용하였다.
막상 1차 예비모임에서 시민패널 과제에 관한 강력한 문제제기가 있었다. 이전의 기고 글에서도 언급되었듯이, 가장 중요한 문제 제기는 “주어진 과제가 일반 시민의 건강권에 대한 논의인지 아니면 쪽방 주민의 건강권에 대한 논의인지”였다. 사실, 예상치 못했던 문제 제기였다. 건강권의 보장 현황이야 다를 수 있겠지만, 보편적 인권인 건강권을 일반 시민과 빈곤층에 따라 분리한다는 것은 추호도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 순간 절망 보다는 가능성이 보였다. 인권 담론이 부실한 한국적 맥락에서 인권 전문가가 아닌 일반 시민이기에 제기할 수 있는 문제였다. 인권의 토양이 척박한 한국적 현실에서 그것부터 논의가 필요했다. 정답이 아니라 토론과 숙의 과정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민패널 내부에서 먼저 비판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당사자인 쪽방 주민이 시민패널 속에 없는 게 맞는가?”, “쪽방 주민을 대상화시키게 된다”라고.
셋째 ‘불확실’한 효과란 건강권 서울시민회의의 사후 영향이다. 앞서 건강권 서울시민회의의 목적을 설명하였지만, 보다 광범위한 목적은 공감과 연대, 사회적 공론화, 정책 연계였다. 하지만 언론, 복지부, 서울시 등 대응 주체들이 반응할지 여부는 불확실하였다.
시민패널은 최종 선언문의 공개방식을 다음과 같이 결정하였다. 복지부와 서울시에 공개서한 전달, 동자동 쪽방 주민에게 전달, 온라인 공개, 보도 자료 배포, 언론 기고. 공개서한 전달 후 복지부는 응답이 없었고 서울시에서 연락이 왔다. 검토하라는 서울시장의 지시가 있었다고 한다. 지난 1월 17일 서울시청에서 시민패널과 서울시 관계 공무원(자활지원, 자활보호, 공공보건, 용산구 보건기획 담당)이 간담회를 하였다. 그리고 지난 1월 22일 동자동 쪽방촌에서 시민패널과 쪽방 주민이 간담회를 하였다. 두 간담회 모두 쪽방 주민의 건강과 삶을 개선하고자 서울시, 시민패널, 쪽방 주민이 소통하고 힘을 모으는 자리가 되었다.
이렇게 ‘불확실’했던 건강권 서울시민회의가 좌초하지 않고 ‘확실’한 사례로 마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참여한 모든 분의 관심과 열의 때문이었다. 이전 기고 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어려운 이웃과 함께 더불어 사는 좋은 사회를 만들고 싶은 소박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였다.
또한 2004년 시민과학센터의 ‘전력정책 미래에 대한 시민합의회의’, 2012년 시민건강증진연구소의 ‘내가 만드는 건강 공약’ 등 한국 사회에서 축적된 시민참여제도 실천 경험, 건강과 보건의료 영역에서 숙의적 민주주의에 대한 실천적·학술적 요구, 지방 정부의 반응성 역시 중요했다. 미시적으로는 건강권 서울시민회의 참여자 간 소통 구조, 프린터와 대자보 같은 기술적(technical) 준비도 중요했다.
그렇다면 이번 건강권 서울시민회의에서 무슨 함의를 얻을 수 있을까?
건강권 서울시민회의 첫 날 시작하기 전에 시민패널은 각자 메모지에 건강에 필요한 것을 적었다. 운동과 가족이 여러 번 나왔고 지속적 관리, 주치의, 내 삶에 대한 결정권, 대기오염, 공동체가 한 번씩 언급되었다. 그 날 기초 강의가 제공된 후 시민패널 토론에는 절반 이상의 시민패널이 쪽방 주민의 불건강과 어려운 삶과 관련해 그들의 의지와 개인 행태가 중요한 문제라고 의견을 제시했다. 더불어 기초생활보장제도 부정 수급자가 있는 것 아니냐는 의문을 표현했다.
하지만 최종 선언문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시민패널의 목소리는 점차 사회 구조적 관점, 정부와 사회의 책임이 필요하다는 방향으로 옮아갔다. 사후 설문 결과, 건강권에 관한 견해가 변화했다고 응답한 시민패널은 13인 중 12인으로 나타났다. 건강권에 관한 견해가 변화한 시기는 2차 예비모임(쪽방촌 방문과 쪽방 주민과의 대화)이 가장 많았고 본회의 1일째(전문가 패널 강의와 집단 질의응답), 본회의 2일째(시민패널 토론) 순이었다.
이러한 사실에서 ‘치우치지 않은 정보 제공’이 중요함을 확인하였다. 아마티아 센의 표현을 빌면 도구적 자유로서 ‘투명성 보장’이다. 이를 위해 건강권 서울시민회의에서는 다양한 입장을 가진 외부 전문가로 구성된 조정위원회가 정보 제공 관련 의사결정을 수행하였다. 사회적 차원에서 이를 담당하는 것은 공정한 언론일 것이다. 하지만 앞서 시민패널의 빈곤층에 대한 시각에서 알 수 있듯이, 현재 한국 사회의 언론 구조와 환경, 생산자들은 그렇지 못하다. 언론의 공정성이 한국 사회의 건강권에 중요한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이번 사례가 보여준다.
또한 한국 사회의 건강과 보건의료 영역에서 ‘일반 시민의 숙의적 참여’가 필요함을 확인하였다. 시민패널은 제공된 정보뿐 아니라 자기 자신의 경험과 상식, 가치를 반영한 총체적 삶의 시각에서 건강권과 쪽방 주민의 사례를 들여다보았다. 이는 사회적 결정요인 보다 보건의료에 집중하거나, 존엄성과 사회관계 보다 재화와 서비스에 주목하는 전문가의 시각과 다른 지점이다. 그리고 설문 결과에서 알 수 있듯이, 시민패널은 더 나은 사회를 위해 열린 마음으로 소통하고 자신과 집단의 목소리를 ‘바꾸고 다듬고 단단하게’ 만들어 갔다. 이런 측면에서 전문 영역으로 선을 긋고 자신이 속한 집단이나 계급적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전문가가 사회 전반의 의사결정을 점유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사회적 성찰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은 것은, 이번 자그마한 사례에서도 숙의 환경 조성에 상당히 많은 시간과 돈, 인력, 노력이 필요했다 점이다. 흔히들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와 다르게 정치적·시민적 권리는 국가의 소극적 의무로도 가능하다고 한다. 하지만 이번 사례는 그러한 생각이 틀렸음을 보여준다. 건강권 발전에도 필수적인 민주주의의 환경 조성을 위해 국가의 적극적 의무가 절실한 상황이다. |